본문 바로가기

FREE NOTE

해가 지나서야 정리하는 10월_03 벌교, 태백산맥 하루기행


쉬는 동안 주말에 여행을 다녀야지 하고는 미루다 미루다 생각난 금요일밤.

내가 가 보고 싶었던 곳의 시간과 티켓을 확인하고는 버스를 예약하여 토요일 아침 출발.

힘들게 도착했다. 정말 오래 걸렸다... 서울에서 이곳 태백산맥 문학관이 있는 벌교읍까지.

서울에서 우등버스를 타고 순천, 순천에서 시내버스로 다시 여기 벌교로 들어오기까지 다섯시간 반 정도 걸렸다. 





풍경이 멋진 지역이거나 나에게 쉼을 안겨줄 그런 곳에 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감명깊게 읽었던 책을 쓴 이의 문학관에도 들러 보고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지역에 가 보고 싶었다.

특히나 벌교, 벌교는 정말이지 꼭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문학관은 깔끔하게 조정래 선생님의 일대기와 그의 소설 역사 전반이 정리되어 있던 곳.

깔끔하지만 세련되거나 멋지다고만은 말할 수 없는 곳. 평범했다. 그래도 좋았다. 

견학을 온 대다수의 아이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대부분 책을 읽지 않고 방문하는구나.




여기 이, 살아 있는 이를 주제로 한 박물관 같은 곳에서 이 사소한 물건들을 보고 감흥을 느끼려면 

그의 글을 읽고 시대상황에 분노하고 글쓴이의 집념에 감탄해 보았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이들은 여기서 무얼 느끼고 갈까? 

그런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요소들도 필요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장도 읽고 가지 않을 쓸데없는 도서관 말고...




타인의 엄청난 노력의 과정과 결과를 그의 소지품이나 친필원고 같은 사물을 통해 

그것이 사실임을 실체로 확인할 때 드는 각성과 자기반성. 난 그걸 느끼고 싶었던걸까봐. 

'황홀한 글 감옥'을 또 다시 읽는 기분이 드는 발걸음. 




글, 글은 무엇인가. 






문학관을 나오면 근방에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는 몇몇 가옥을 만들어 놓았다.

태백산맥의 도입부가 시작되는 무녀 소화의 집. 




유리로 막아 놓은 틈 사이로 빼꼼 들여다보니 요렇게 제삿상도 차려져 있다.




뒷편엔 현부자네 집도 있고. 한번 스윽 둘러보면서 소설 속 장면장면을 슬며시 떠올려 보고 오기 좋다. 




문학관에서 나오자 이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 것인지 막막하였으나

현대인에게는 스마트폰이 있다. 지도 앱이 없었으면 이날의 여행은 정말 힘들었을 듯(있어도 힘들었다)... 

이 길을 몇 번 왕복했는지 모르겠다. 벌교 사람들은 막상 태백산맥이니 조정래 생가니 전혀 관심이 없어 길을 물어도 늘 헛수고였다. 




오전에 너무 오래 걸려 도착한 탓에 오후가 된 지가 한참이다. 

그다지 맑은 날은 아니었기에 하루종일 날씨도 꿀렁꿀렁. 이러다 해가 질까봐 마음은 급하지만 

밥은 먹어야 했기에 거의 뛰는 자세로 배낭매고 총총... 






지도앱과 출력해 간 벌교읍 지도를 억지로 맞춰가며 길을 따라 걸어 가니 꼬막집들이 가득.

1박2일 사진들이 잔뜩 프린트된 간판의 꼬막집들이 모여 있는 여기에서 어딜 들어가야 할 지 의문이었으나 

그렇다면 가장 크고 혼자 먹어도 민망하지 않을 곳으로 골라잡고는.  




뭐든지 저 다 못 먹으니깐 절반만 주세요, 라고 하였으나.

꼬막전 꼬막무침 꼬막회 꼬막찜 꼬막된장 양념꼬막... 


내 기대 속 '벌교의 꼬막'은 이런 게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 많은 꼬막들 절반도 먹지 못한 식사를 마치고 나니 입에서 꼬막이 나올 것 같은 기분. 





소화다리... 색색깔의 알 수 없는 현수막과 깃발들이 키치함 그 자체였던. 

그 어떤 감흥도 느낄 수 없어 서둘러 지나왔다.




다음 목적지로 가려고 길을 한참 돌아 가다 여기 보성여관에 가는 걸 까먹었었구나. 

지도를 보니 아까 내가 갔던 길 근처에 있었구나. 먼길을 또 다시 돌아가서 도착. 




벌교읍 전반에서 느껴지는 키치함과 억지스러운 소설 속 모습의 설명들과 대조적으로

센스있고 멋지게 잘 관리된 이곳. 문화유산국민신탁이라는 민간기구를 통해 관리되고 있다는데 참 괜찮았다. 

입구의 카페부터 시작해 자그마한 전시실, 실제 사람이 묵을 수 있는 숙소, 2층의 다다미방까지. 




일본 목조건축의 흔적이 그대로. 이웃집 토토로의 먼지 캐릭터들이 나올 것 같은 딱 그런 계단이다.





여기서 하루 묵으면 참 좋겠다 했는데 1층 안쪽에 있는 숙소를 보니 그런 아쉬운 마음이 더 커졌었다. 

하지만 이미 나는 당일치기로 돌아가기로 한 몸. 

여유있게 차 한 잔 마시고 가고프지만 이러다 해가 질 것 같다. 선암사에 가고 싶은데 갈 수 있을까. 






왔던 길 또다시 걸어가기.



태백산맥길 곳곳에 이렇게 태백산맥의 등장인물 설명들이 있다. 음... 흠... 




사람 찾아보기 힘든 이 길에는 문을 닫은 가게들도 여럿 있고



이런 괴식물들을 팔기도 한다. 판매자는 어딜 가고 이것들만 남아 자릴 지키고 




한산한 벌교역

벌교 이곳은 모든 주제를 태백산맥에 기대고 있구나 싶었던 정말 조용하고 심심한 동네


어쨌든 여기까지 힘들게 왔으니 선암사에 가야겠다. 어떻게라도 갔다가 가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자가용이 없는 이상 여기서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택시. 

벌교에서 선암사로 가는 코스는 대중교통으로는 참 힘들다. 

다시 처음 시외버스에서 내렸던 순천으로 돌아가서 순천에서 선암사로 가는 격이라...




선암사에서 순천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 시간에 맞추기 위해 택시를 타고 달려 도착한 선암사. 

시범적 대처승이었던 아버지를 둔 조정래 선생님의 출생지이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가 극찬했던, 벌꽃이 가장 아름답다던 선암사.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벌써 어둑해진 하늘에 달리듯 한참을 걸어 들어온 선암사.






무리하게 몰아붙인 일정 덕에 시간에 쫒겨 구경했지만 그래도 태백산맥 기행이랍시고 와서

문학관과 꼬막정식으로 하루를 끝내기엔 너무나 부족했는데 선암사가 부족한 마음을 가득 채워주었다.


선암사를 나설 즈음엔 길이 너무나 깜깜해져 묘한 기분. 

어둑한 시골길을 버스로 달려 기차역으로... 




늦은 밤 남아있던 열차인 무궁화호를 타고 다시 집으로. 

책 한 권을 다 읽어 버리고 잠을 자고 또 자도 여전히 기차 안...

그렇게 하루의 시간을 꽉꽉 채워 보낸 벌교 하루기행